바깥세상은 왜 아직

만삭 때였다. 나는 집을 떠나 친정에 머물던 중이었다. 배는 무겁고 시간은 더뎠다. 다섯 살 조카의 유치원 하원 시간에 맞춰 데리러 나갔더니 가방을 메고 호다닥 뛰어나오며 내게 물었다. "이모! 오늘도 애기 안 나왔어요?" 그렇다고 하니 손으로 내 부른 배를 도닥이며 다시 물었다. "그럼 배를 잘라서 애기 꺼낼 거예요?" 그 말이 우스워 풀풀 웃었다. "난 나오기 싫어서 막 고집을 부려서 우리 엄마가 배를 잘라서 꺼냈는데." 왜 나오기 싫었느냐 물었다. 조카가 해맑게 대답했다. "바깥은 음, 너무 춥고 불편할 것 같았어요." 아이가 많이 자라기 전 엄마 뱃속 시절을 물으면 별별 귀여운 대답을 다 한다는 말을 들은 적 있었다. 아이의 상상인지 진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엄마와의 최초 기억을 만들어가는 소중한 대화일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이가 자란다면 한 번쯤은 물어보고 싶었고, 이제 다섯 살이 된 우리 아이는 꽤나 참신한 이야기를 나에게 소담소담 건네주었다. "나는 엄마 뱃속에서 막 뛰었어. 너무 심심해서. 혼자 놀면 정말 심심해. 그리고 엄마 배를 간질이기도 했어. 그러면 엄마가 막 웃었어. 재밌어서 자꾸자꾸 간질였어. 어둡지 않았는데? 환했어. 여기로 불빛이 들어왔는데?" 아이는 내 배꼽을 가리켰다. 엄마 배꼽을 통해 새어들어오는 노란 불빛으로 뱃속 생활을 즐겼다 우기는 다섯 살 아이. 나는 까르르 웃었다. 아이가 태어난 후로 나는 작은 일에도 분노하는 사람이 되었다. 작지만 사사롭지는 않은 일들이다. 실은 분노라기보다는 '걱정'이다. 자라면서 내가 겪었던 불평등과 불의가 여전히 고스란히 남아 이 작은 아이들이 마저 자란 세상도 변한 것이 없을까 봐.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잠깐 고민했었다. 이런 곳에 어린 생명 하나 툭 떨구어놓아도 괜찮은 것일까 싶어서였다. 그때 나를 위로했던 생각은 한 가지였다. 적어도 이 아이들이 자랄 때쯤엔 세상이 달라져 있을 거야. 민망하게도 아직은 달라질 기미를 간파해내지 못하고 있다. 서른다섯 살이었던 내 아버지는 포항에서 완행버스를 타고 설을 쇠러 강원도 삼척으로 가곤 했다. 양복을 차려입고 넥타이를 매고 롱코트를 입고서 말이다. 좌석은 없었고 아버지는 다섯 시간 반을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버스 통로에 서서 꼬불꼬불한 7번 국도를 따라갔다. 다섯 살 나를 안고서 말이다. 너그러운 어떤 아주머니가 나를 받아안아 겨우 한시름 던 아버지는 버스 차창 밖으로 흰 파도가 치는 바다를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다섯 살 둘째 딸이 서른이나 마흔이 될 무렵에는 세상이 말짱하게 변화해, 폭력도 위계도 추행도 없는 고운 날들이 올 거라 마냥 믿고 싶었을까. 보나 마나 나는 낯 모르는 아주머니의 무릎에 앉아 아무 노래나 흥얼거렸겠지. 노래를 부르다 말고 아버지를 쳐다보면, 당신은 눈을 반달처럼 접어보이며 나를 향해 웃었다. 그 장면은 여태 나의 뇌 속에 선연하다. 나는 마흔두 살에 아이를 낳았다. 그러므로 내 아이는 또래 친구들보다 적어도 10년은 빨리 부모와 이별하게 될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미안한 마음으로 애초 이 인연을 시작했다. 내 아버지가 딸이 앞으로 살 세상을 위해 그 어떤 대단한 일도 벌이지 못한 소시민으로 살았듯 나 역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기껏해야 화나 내고 어느 청원엔가 서명이나 하겠지. 이렇게 별 볼 일 없는 어른이 되다니. 아이가 내 배를 더듬었다. 제왕절개 수술 자국은 희미하게 한 줄로 남아 있다. "여기로 나를 꺼냈어?" 내가 끄덕이자 아이는 얼굴을 찌푸렸다. "피가 많이 났어?"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 또 끄덕였다. 아이는 이내 울상이 된다. "아팠겠다……" 그런 말을 하는 아이를 가만히 안으면, 미뤄둔 일들이 무수히 떠오른다. 바깥세상은 왜 아직도 불편해? 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어른들이 아무래도 좀 바빠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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